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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추모 앨범> '이름모를 소녀'외 14곡 그리고 세번째 이야기...

용흥 2016. 2. 14. 00:10


 

    
    






     김정호 추모 앨범 1986

    '이 소녀' 14곡 그리고 세번째 이야 


    1973년 "이름모를 소녀"로 데뷔하여 싱어송 라이터로서 많은 힛트곡을 냈던 가수 김정호씨가 1985년 11월 33살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기 위해 동료 선,후배 가수들이 생전 김정호가 불렀던 힛트곡들을 다시 녹음해서 발표한 헌정 앨범.







    [곡목 리스트 &생시간]

     

    SIDE A
    01. 이름 모를 소녀 (김정호 작사,작곡/김범룡 노래)

          00:00  
    02. 인생 (김정호 작사,작곡/김수희 노래)

          04:07
    03. 님 (김정호 작사,작곡/김현식 노래)

          07:01
    04. 나그네 (김정호 작사,작곡/전영록 노래)

          12:03
    05.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김정호 작사,작곡/김학

           래 노래)15:51
    06. 기다림 (김정호 작사,작곡/강은철,이태원 노래)

          20:44
    07. 잊으리라 (김정호 작사,작곡/송창식)

          23:56


    SIDE B
    01. 보고싶은 마음 (김정호 작사,작곡/신형원 노래)

          28:20
    02. 지난 겨울엔 (김정호 작사,작곡/홍민 노래)

          32:25
    03. 하얀 나비 (김정호 작사,작곡/윤시내 노래)

          36:24
    04. 사랑가 (김정호 작사,작곡/하남석 노래)

          40:14
    05. 빗속을 둘이서 (김정호 작사,작곡/한마음 노래)

          42:47
    06. 작은새 (김정호 작사,작곡/윤승태 노래)

          46:33
    07. 사랑의 진실 (김정호 작사,작곡/서수남,하청일 노래)

          50:49
    08. 세월, 그것은 바람 (김정호 작사,작곡/이정선 노래)

          53:25  

     

     

     

     

     

     [음유시인] 김정호의  세번째 이야기...

    세번째 이야기는 김정호의 영원한 동반자인

    이영희씨의 남편 김정호에 대해 쓴 글 입니다. 


    그를 무섭게 옥죄던 고통 만큼이나 사나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12월 2일의 금촌 기독교 공원묘지.  내 남편, 가수 김정호는 양지바른 그곳 한 곁을 차지하고 땅 속 깊숙이  누웠습니다.  영원히 깰 수 없는 잠이 든 채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눈물로 범벅 된 흙으로 덮이는 그의 관을 보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그가 활짝 웃으며 맞을 것만 같았습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도무지 나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비극의 한장면 들일 뿐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서른 세 해를 살고 이제 그는 떠났지만 세상에 두 가지의 귀한 것을 남겨놓았습니다.   쌍 쌍둥이 딸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득한 정을 불어 넣던 많은 노래들, 그는 그 속에서 다시 이 세상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월 28일 그러니까 숨을 거두기 전날 저녁,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사옵니다,  주여 어서 빨리 제 맘속에 드시옵소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운명을 예감한 듯 육신의 고통을 없애달라는 여느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깊은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자 속절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었습니다.

       


    “울지마. 당신 우는걸 보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앙상한 손으로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던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실쭉 웃으며 ‘내가 죽으면 땅 한 평만 사서 묻어 줘’란 말을 세번씩이나 거듭했습니다.   내가 침대에 기대 깜박 잠이라도 들라치면 몹시 싫어했지요.  “날 계속 지켜보고 있어줘.”   고통과 싸우느라 마지막 안간힘을 쏟던 그는 마침내 다음날 12시 15분 한 많은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비통한 울부짖음과 기도 속에.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란 굳은 믿음과 희망이 그대로 사그라지던 그 순간 저는 하느님 마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를 왜 그렇게 미워하셨습니까?’ 라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날 밤하늘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집에서 그이가 쓰던 물건들을 챙기면서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이 파노라마 처럼 떠올랐습니다.


    나의 남편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입니다.  그이와 나는 1952년생 동갑 나기입니다.  교동 초등학교 동창생이기도 하죠.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 좋아하며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대구 집에 내려가자 그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도 한 달 내내. 하지만 그 편지는 처음 세 통 외에는 모두 어머니 손에 들어갔지요. 내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대로 포기한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 겨울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만두를 빚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  길래 나가 보았습니다. ‘아, 그이구나’ 하며 돌아서서 나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리엔 기름을 발라 하이칼라로 넘기고 빨간 넥타이까지 맨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고 안어 울리던지, 그래도 그이 딴에는 날 찾아온다고 반코트도 빌려 입고 잔뜩 멋을 냈다는 겁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집에 들어 올 용기가 안나 막걸리까지 한 사발을 다 마셨다는군.  그날은 만두 국만 한 그릇 대접하고 어머니께서 타일러 보냈습니다.  또 한동안  소식이 없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니던 늦은 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를 처음 취입한다며 재킷사진을 싸서 회사로 찾아온 그 이나는 처음 으로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기고 그곳에 그냥  갔으려니 하고 갔는데 웬걸, 그는 그때까지 다방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이 주변엔 담배꽁초가 수북했었습니다.   “아직까지 영희씨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 그윽하게 날 지켜 보던 그이가 대뜸 하는 말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지요.  영희씨를 꼭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요.” 

     


    그날 명동의 ‘쉘브르’에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촉촉이 젖어드는 그이의 노래 속에서 어느새 내 마음은 그이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좁은 곳을 싫어해서 우리는 주로 경복궁, 삼청공원, 여의도 잔디 밭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이, 나는 꽃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에 이어 한나절 동안 만들었다는 「하얀 나비」 인기가 신나게 올랐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이 몸 속에 깃든 병마도 활동을 시작했던 겁니다.   그땐 가끔 기침이 잦은 정도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그이가 폐결 핵 환자라는 말을 듣곤 펑펑 울다가 이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하고 그이를 활짝 받아 들였습니다.  


     아버님이 안계셨고, 장녀라서 그이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했던 거지요.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병마와 싸운 덕에 완치됐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이에게 닥쳐온 돌이 킬 수 없었던 큰 시련은 ‘대마 초사건’ 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잃고 또 다시 병이 찾아들었습니다. 1975년 봄, 우리는 집안 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약혼식을 올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하나를 만들면서 자신의 생을 한조각씩 떼어바치던 그이, 촛불만 켜고 밤늦도록 곡을 만들면서도 피곤하기는 커녕, 기쁨의 빛을 뿜어내던 그이,  그런 그이와 밤을 꼬박 새우기도 여러 날이었지요.   1977년 3월 27일, 아직 그이가 활동을 못하고 어려움에 빠져있을때 일영가는 길목의 은평교회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작고 가무잡잡한데다가 눈만 휑하니 커서 무척 어둡고 볼품없어 뵈던 그이. 무척 세심하고 엉뚱한 면도 참 많았지만 우린 오손도손 참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아플 때면 무조건 잘 먹어야 낫는다며 돼지고기를 사와 고추장을 넣고 볶음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정작 당신께선 식성도 까다로워서 고기를 먹으라면 약같이 생각하시더니.  이윽고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분만의 고통 때문에 내가 ‘지금 안 낳고 조금 있다 낳을레요’ 라며 헛소리를 하더라나요. 당신을 쏙 빼어 닮은 쌍둥이 딸아이를 그이는 참으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말 그대로 ‘행복의 절정’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대마초 가수들에 대한 규제가 풀렸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춤이라도 한바탕 추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작곡과 레코드취입에 쏟아넣느라 몸조리는 자연 생각 밖이었던가 봐요. 차 오르는 숨과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새는 밤이 계속되는 그이를 보기란 여간 안타까운게 아니었습니다.   말려야 했습니다.  그이의 삶을 계속 잇기 위해서는.  하지만 그의 생을 지탱해 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노래를 그에게서 앗아간다는 건,  더욱 큰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그이를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타이틀로 재기 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님」등을 발표하고 결국, 인천 송도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12월, 그이가 요양을 시작한지 4개월 째가 되던 날, 아무도 찾아 올리 없는 저녁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이였습니다.  담당 의사분께 인사도 않고 그이는 마침내 요양원을 뛰쳐나온 겁니다.  그이를 사로잡은 노래에의 집념, 그것은 더 이상 잠재우지 못할 뜨거운 불꽃이었습니다.  그이는 고통을 안으로만 안으로만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파 사랑하는 아이들과 더 많이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했습니다. 

     


    그이와 함께 산 10년, 그 당시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커다란 아쉬움 만남습니다.   최근 2년 동안 우리에겐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노래에 전념한 값을 그이는 고통으로 치러냈습니다.   작년부터는 병원 입원이 잦아졌습니다.   환절기만 되면 가뜩이나 약한 몸에 저항력이 떨어져 합병증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그이의 병도 깊어만 갔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렸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토록 어려움을 치르고 있을때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님과 신앙 속에 빚어진 그이의 선배님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한 형제처럼 찾아와 기도하며 찬송하며 그이를 일으키려 애쓰던 분들께 그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해야 할는지요.    


    지난 일요일엔 그이를 만나러 금촌에 갔었습니다.  인부들이 그의 무덤 집을 만드느라 떼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해. 수고하신다고 내 대신 점심 값도 드리고 그 이 성격에 틀림없이 이런 말을 할 것 같아 웃음이 쿡쿡 나오더군요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이가 누워 있는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냉정한 바람은 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 놓았습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프다고 그이는 노래했지만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싶습니다.  내겐 그이를 닮아 맑은 눈을 가진 두 아이,  정선이와 정훈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까지 바친 그의 노래가 영원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