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명동의 ‘쉘브르’에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촉촉이 젖어드는 그이의 노래 속에서 어느새 내 마음은
그이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좁은 곳을
싫어해서 우리는 주로 경복궁, 삼청공원, 여의도 잔디 밭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이, 나는 꽃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에 이어 한나절 동안 만들었다는 「하얀 나비」 인기가 신나게 올랐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이 몸 속에 깃든 병마도 활동을 시작했던 겁니다. 그땐 가끔
기침이 잦은 정도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그이가 폐결 핵 환자라는 말을 듣곤 펑펑 울다가 이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하고 그이를 활짝 받아 들였습니다.
아버님이 안계셨고, 장녀라서 그이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했던 거지요.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병마와 싸운 덕에
완치됐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이에게 닥쳐온 돌이 킬 수
없었던 큰 시련은 ‘대마 초사건’ 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잃고 또 다시 병이 찾아들었습니다. 1975년 봄,
우리는 집안 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약혼식을 올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하나를 만들면서 자신의 생을 한조각씩 떼어바치던 그이, 촛불만 켜고
밤늦도록 곡을 만들면서도 피곤하기는 커녕, 기쁨의 빛을 뿜어내던 그이, 그런 그이와 밤을 꼬박 새우기도 여러 날이었지요. 1977년 3월 27일, 아직 그이가 활동을 못하고 어려움에 빠져있을때 일영가는
길목의 은평교회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작고 가무잡잡한데다가 눈만 휑하니 커서 무척 어둡고 볼품없어 뵈던 그이. 무척 세심하고 엉뚱한 면도 참 많았지만
우린 오손도손 참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아플 때면 무조건 잘 먹어야
낫는다며 돼지고기를 사와 고추장을 넣고 볶음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정작 당신께선 식성도 까다로워서 고기를 먹으라면 약같이 생각하시더니.
이윽고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분만의 고통 때문에 내가 ‘지금 안 낳고 조금 있다 낳을레요’ 라며 헛소리를 하더라나요.
당신을 쏙 빼어 닮은 쌍둥이 딸아이를 그이는 참으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말 그대로 ‘행복의 절정’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대마초 가수들에 대한 규제가 풀렸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춤이라도 한바탕
추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작곡과 레코드취입에 쏟아넣느라 몸조리는 자연 생각 밖이었던가 봐요. 차 오르는 숨과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새는 밤이 계속되는 그이를 보기란 여간 안타까운게 아니었습니다. 말려야 했습니다. 그이의 삶을 계속 잇기 위해서는. 하지만 그의 생을 지탱해 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노래를 그에게서 앗아간다는
건, 더욱 큰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그이를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타이틀로 재기 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님」등을 발표하고 결국, 인천 송도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12월, 그이가 요양을
시작한지 4개월 째가 되던 날, 아무도 찾아 올리 없는 저녁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이였습니다. 담당 의사분께 인사도 않고 그이는 마침내 요양원을 뛰쳐나온 겁니다. 그이를 사로잡은 노래에의 집념, 그것은 더 이상 잠재우지 못할 뜨거운
불꽃이었습니다. 그이는 고통을 안으로만 안으로만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파 사랑하는 아이들과 더 많이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했습니다.
그이와
함께 산 10년, 그 당시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커다란 아쉬움 만남습니다. 최근 2년 동안 우리에겐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노래에
전념한 값을 그이는 고통으로 치러냈습니다. 작년부터는 병원 입원이
잦아졌습니다. 환절기만 되면 가뜩이나 약한 몸에 저항력이 떨어져
합병증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그이의 병도 깊어만 갔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렸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토록 어려움을 치르고 있을때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님과 신앙 속에 빚어진 그이의 선배님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한 형제처럼 찾아와 기도하며 찬송하며 그이를 일으키려 애쓰던 분들께
그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해야 할는지요.
지난
일요일엔 그이를 만나러 금촌에 갔었습니다. 인부들이 그의 무덤 집을 만드느라 떼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해. 수고하신다고 내 대신 점심 값도 드리고
그
이 성격에 틀림없이 이런 말을 할 것 같아 웃음이 쿡쿡 나오더군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이가 누워 있는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냉정한
바람은 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 놓았습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프다고 그이는 노래했지만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싶습니다. 내겐 그이를 닮아 맑은 눈을 가진 두 아이, 정선이와 정훈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까지 바친 그의 노래가
영원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