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목소리는 신의 선물이다. 단 한번 멜로디를 들으면 곧바로 소화해 내는 절대음감까지 겸비했다면 신의 축복일 것이다. 이 모두를 갖춘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이다
'엘레지의 여왕',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 '살아있는 트로트의 전설', '국민가수', '한국이 낳은 영원한 디바!'….
그녀에겐 수많은 수식어와 찬사가 따라다닌다. 이미자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600여 장의 음반과 2천여 곡이 넘는 노래를 발표해 한국 최다 음반, 최다 취입곡 가수로 기네스북에 까지 등재된 가수다. 그녀가 시대를 초월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모든 음역 대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목소리와 화려한 기교를 구사하지 않아도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드라마틱한 가창력 때문이다. 대중을 의식한 가식이나 기교를 찾을 수 없는 그녀의 진솔한 노래는 마치 순박한 시골누이 같은 친근감을 준다.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각종 노래자랑을 휩쓴 타고난 음악성을 보였다. 여고 졸업을 앞둔 1958년 최초의 민영TV 방송 HLKZ의 '예능 로터리'에 출전해 최고상을 받은 이후 '행여나 오시려나' 등 4곡을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하면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정식데뷔한 후 1964년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했던 '동백아가씨'의 대박 행진은 그 당시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1965년 말 '동백아가씨'는 한·일수교를 반대하는 뒤숭숭한 시국과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후속곡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며 거침없는 행진을 계속했다.
이후 1967년 4장의 음반과 책자가 수록된 나무박스 음반세트가 탄생됐는데 이 음반은 국내 가수 최초의 박스음반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7살의 나이에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리지의 여왕'이 제작되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노래 하면 이미자’이던 시절에 어느 일본인이 그의 성대를 사갈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이유는 물론 노래를 너무 잘해서다. 보통 사람의 목으로는 노래를 그렇게 잘할 수 없으니 사후에라도 그의 성대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얘기 같지만 그 시절엔 제법 그럴 듯한 얘기로 들렸었다.
그리고 다시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미자’란 이름은 아직까지도 왕성하다. 올해 나이 일흔 다섯, 웬만한 젊은 가수들도 쉽게 엄두를 못내는 전국 투어를 요즘도 해마다 빼놓지 않고 다닐 정도니 그녀의 음악생활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녀의 56년 노래 인생의 첫 번째 기록전이 현재 춘천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2월말까지 열리는 ‘이미자 특별전’에서는 1959년 데뷔 시절부터의 활동 모습과 음반, 의상 등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처음엔 회고전이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왕성한 이미자의 활동을 보면 오히려 이른 게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어쨌거나 대단한 음악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