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생각이 작곡되고 불리던 시기는 한국이 일제통치를
받던때 였습니다.
▲최순애 살던 수원 장안문 근처. 수원성 복원사업으로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작사를 한 최순애 선생이 13살 소녀때 수원시 북수동 장안문에서 화홍문에 이르는 선광
아래동네에 살았는데 이 일대가 밭 논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사시사철 새들이 날아와서 "뜸북 뜸북, 뻐국 뻐국" 이렇게 울어댔다고
합니다.
“당시 나에게는 오빠 한 분이 있었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따라다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그런 오빠를 그리며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보면서 울다가 돌아왔다.”
그런 오빠를 기다리면서 여동생이 동요를 지었고 이게 잡지에 실려 이곡을 보고 감명받은 청년 작곡가가 곡을 붙이면서 여동생이 아닌
온 국민의 기다림의 노래가 됐다고 합니다.
▲ 최순애 작사(동시 ‘오빠 생각’을 지은 )
훗날 여동생이였던 최순애선생의 인터뷰를 보니까, 결국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일경에 쫒겨다니다가 건강을 잃어서 요절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던데..
고운 댕기를 사오겠다던 오빠,
그 오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이런 생각도 드네요.
아픈시절 그렇게 더욱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크게 담긴 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 '오빠생각'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