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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섬>,김원중 '바위섬' 곡에 얽힌 이야기...

용흥 2016. 1. 22. 00:45

 

 

    
    





     

    김원중 '바위섬' 곡에 얽힌 이야기...







    ['바위섬' ]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것은 바위섬과 흰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싶어라~~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바위섬' 곡에 얽힌 이야기...

     

    이 노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고향이 섬이라 그렀는지 아무튼 이래저래 많이 불렸습니다, 한 번은 가을대학 축제 때 친구들의 부추김에 이 곡을 가지고 가요경연대회에 참가한 적도 있습니다.

    몇 등 했냐고요?

    이것 비밀입니다,

    아주 개망신 당했습니다. ㅎㅎ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없던 이곳에 세상사람 하나 둘 모여 들더니..."


    1984년에 발표가 됐고 발표된 이후에 바로 각종 가요프로 인기순위는 물론이고 MT, 야영장 등 통기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이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바다를 추억하는 대중가요라고 알고 계신분도 많았는데 이 노래속의 바위섬은 과연 어디일까요?


    파도가 부서지던 그 바위섬은 어디일까요?

    노래 속 바위섬은 특정지역에 있는 섬은 아니구요, '광주' 1980년대 광주를 표현하는 거 였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칠때 당시 미국 타임즈 기사에서 이 광주 상황을 '고립된 섬' 이렇게 표현을 하면서 이런 노래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가수 김원중씨가 인터뷰에 밝힌 내용으로



    “음악이라기보다 놀았죠”


    1980년 5월18일 당시 김원중씨는 전남대 2학년이었다. ‘운동권’은 아니었다. 공부보다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게 좋았다. 그의 말대로 ‘속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김씨도 5·18 현장에 있었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눈으로 봤다면 누구나 동조했을 것이다”



    김원중씨는 지역 선후배들과 만든 그룹사운드 ‘로터스’에서 활동했다. 5·18이 지나고 군을 제대한 김씨는 복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함께 ‘놀던’ 조선대 배창희씨가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들고 왔다. 배씨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고립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 당시 계엄군은 외부로부터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작전을 폈다. 광주에서 나갈 수도, 광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김원중씨도 배씨의 말에 공감하며 곡을 불렀다.


    당시만 해도 서울이 아니면 음반을 만들기 어려웠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음반에 관한 모든 것은 서울로 통했다. 김원중씨와 그의 동료들은 광주에서 음반을 만들기로 했다. ‘왜 지방에서는 음반을 만들 수 없을까’ ‘다양성 측면에서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1984년 김원중씨를 비롯해 광주에서 ‘노래 좀 한다’는 이들이 모여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을 냈다. LP판 표지까지 자기들 손으로 그렸다. 지역에서 만든 최초의 음반이다. 김원중씨는 이 음반에 막내로 참가해 ‘바위섬’을 불렀다.



    처음부터 가수가 되려고 한 건 아니다. 대학가요제 무대에 오른 적도 없다. 그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 힘’으로 음반 한번 내보자는 거였다. 일종의 기념음반이다. 그런데 ‘바위섬’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다. 김원중씨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며 1985년 방송에 출연, ‘대학생 스타 가수’가 됐다.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하에서 ‘5·18 광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였다. 1981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정오차씨는 ‘바윗돌’이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오차씨는 ‘바윗돌’의 의미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과 대척점에 있던 ‘5·18 민주열사’의 넋을 기리는 노래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방송을 탄 셈이다. ‘바윗돌’은 바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김원중씨도 데뷔 방송에서 바위섬이 ‘5·18 광주’를 의미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방송에서 처음부터 내놓고 바위섬의 의미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방송에 나갈 때마다 ‘나는 광주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씨는 방송이 아닌 개인 공연 무대에서 바위섬의 의미를 소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바위섬’은 ‘5·18 광주’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바위섬’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김원중씨는 “관리자들이 제 말을 잘 못들었든가, 아니면 제가 얘기를 잘 (애둘러) 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바위섬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를,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바위섬’은 북한 사람들도 아는 노래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면, 북한 평양 김일성 대학 젊은이들 사이에서 ‘바위섬’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저도 예전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들으면서 이 바위섬이 어디일까? 생각했었는데 이 바위섬이 1980년 광주 라는 건 처음 알게 됐네요. 그리고 1980년 광주를 바위섬에 놓고 오늘 가사를 이렇게 들어보니까? 그 표현 하나하나가 의미 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