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석 역사
백제 진사왕 7년(39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3년)에 중국으로부터 축산조성법 (縮山造成法 : 정원에 인위적으로 산이나 냇물을 만들어 감상하는 것)을 들여온 것을 계기로 수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축산조성법을 통해 정원을 자연축경화(自然縮景化)한 것이 수석 취미의 시초일 것이다.
신라의 삼국유사(三國遺事 : 1285년)에 승전 법사(勝註法師)가 선산 금오산에서 8O여 개의 돌에게(달마상으로 추측됨)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고 있던 중 그 주위에 무수한 꽃이 피어 있더라는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지금도 금오산 일대에서 꽃돌〔花紋石〕이 많이 탐석(探石)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문익점(文益漸 : 1329~1398)은 중국의 사신으로 있을 때 중국의 많은 문인 묵객(文人量客)들이 애석(愛石)을 통해 풍류를 즐기는 것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아 애석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경남 산청군에 있는 선생의 사당(洞堂)에는 유품인 듯한 괴석(怪石)과 기석이 전래, 보전되고 있다.
조선 시대의 많은 명인(名人)들도 애석하였던 혼적이 남아 있다. 인제 강희안(仁齊 姜希頻 : 1417~14H)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괴석에 대한 감상과 연출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수석사(壽石史)에 값진 고전(古典)으로 탐독되고 있다. 양화소록에는 『돌은 굳고 곧은 덕을 가졌으므로 군자의 벗이 됨이 마땅하다.』고 돌을 예찬한 글귀가 적혀 있다. 그는 훌륭한 괴석도(便石圖)도 많이 그렸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이도 수석을 애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특히, 문양석(線樣石)을 좋아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 1762~1836)은 귀양지에서 스스로 탐석한 돌을 아낀 흔적이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도 돌을 무척 사랑하여 당대의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 1769~1845)에게 시문을 지어 주고 돌을 얻어와서 진열하여 감상하였다고 한다. 수석을 즐기며 쓴 『天下怪石)』『壽石老苔池館』『山水石』 등의 명필들은 사본(寫本)과 서각(書刻)으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창덕궁에는 대원군이 애장하던 괴석들이 비원이나 창경궁에 있는 많은 전래석(傳來石)과 함께 남아 보전되고있다.
그 밖에도 많은 문인들과 풍류객들이 수석을 즐겨 온 흔적이있다.
시인 강추금(姜秋琴)은 문방 오우(文房五友)로서 돌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는 수석을 보고 『三十年來收怪石案頭無數小名山 : 3O년을 괴석과 함께 하니 책상머리에 명산들이 우뚝 솟았구나.』라고 하였고,향석 김용진(香石 金容鎭)은 돌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운명할 때 자기와 함께 묻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오우가(五友歌)에서의 한 구절 중에는 애석인들의 가슴을 치는 부분이 있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위와같이 옛 선비들의 애석 사상은 돌의 숨결을 마음 속으로 들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근세 조선의 시와 서예의 거봉(巨峯)인 옥수 조면호(玉垂 趙冕鎬:1803~1887)는 한국 근세 수석사를 재조명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애석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지은 『예석기(禮石記)』에는 무려 약 7,000수에 이르는 주옥 같은 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수석을 예찬한 시문은 오늘날 많은 애석인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고있다. 그는13세에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돌을 사랑한 스승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다만 추사와는 달리 대개는 돌마다 아름다운 시문을 짓고 즐겼다는 점이다. 그의 뼈 36세 때 부안(扶安)의 채석강(彩石剛)에서 탐석한 연화(連花) 무늬의 문양석을 감상하며 지은 『채석소조가(彩石小照歌)』는 이 때의 문인 사회에 화제가 되어 옥수에게 돌을 선사하고 『예석기』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연출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흔적이 남아 있다 6O세 때 아주 작은 산형석(山形石)을 진열하여 그 옆에 작은 국화분(菊花盆)과 아주 작은 벼루와 필가(筆架), 그리고 연적(姐適) 배열해 놓고 묵상하며사물의 크고 작은 이치를 시로 읊었으며 62세 때에는 산수경석에 석창포(石昌浦)를 심어 탁상 위에 올려 놓아 수정산(水晶山)이라 이름 짓고 물을 뿌리며 『마주보게 진열하니 피서하는 기분』이라며 시를 지었다는 기록은 그의 예석도(禮石道)의 높은 경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 밖의 많은 문인들도 돌을 사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간혹 국립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옛 고화(古書)에 가끔 괴석도 (怪石圖)가 발견될 따름인데 여기에 몇 점이 있다. |